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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3일 목요일

하나님의교회 패스티브 [사랑이 식는 이유]

사랑이 식는 이유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소식은 기쁨과 희망보다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하다. 누군가는 이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불과 몇 년 사이, 우리 사회는 더욱더 불안과 슬픔이 커지고 있다. 이웃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거나 믿지 못하는 사이가 된 지 오래며, 돈을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아내와 남편, 심지어 자식까지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서슴 없이 벌이기도 한다. 세상은 왜 이토록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사회가 되었을까. 왜 사람들은 원통함과 분을 참지 못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랑하는 가족을 버릴 수 있는 것일까. 성경은 일찍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사도 바울은 세상이 각박해지고 사람들이 악해지는 이유와 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꼬집고 있다. 요지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이유가 불법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24:3, 12~13)

결국 현재 우리 사회에 이토록 불안과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법과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께서 이미 그 명쾌한 해답을 알려주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 곧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 안식일, 유월절을 비롯한 7개의 절기, 여 성도들의 수건 규례 등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불법과 불안과 절망으로 혼탁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끝까지 인내로써 지키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기쁨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이 전해지고 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8)
 
 
출처_패스티브
 
 

2014년 10월 7일 화요일

하나님의교회 패스티브[두 개의 동아줄]

 두 개의 동아줄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호랑이를 피해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에 대한 이야기다. 오누이의 사연은 이렇다.

오누이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웃에 품팔이를 다녀오던 어머니는 호랑이를 만나 잡아 먹히게 된다. 어머니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호랑이는 어머니로 변장해 오누이의 집까지 찾아간다. 오누이는 호랑이의 목소리와 손바닥이 어머니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곤 문을 열어주지 않고, 호랑이를 피해 우물가에 있던 큰 나무 위로 도망갔다. 오누이를 쫓아온 호랑이는 처음엔 오라비의 말대로 나무에 참기름을 바르고 오르려다 실패하고, 그 다음엔 누이가 일러준 대로 나무를 도끼로 찍으며 올라와 오누이에게 바짝 다가선다. 호랑이에게 잡아 먹혀 죽을 위기에 놓인 오누이는 하늘에 동아줄을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간다. 이를 본 호랑이도 하늘에 동아줄을 내려달라고 기도를 했다. 하늘은 호랑이에게 썩은 동아줄을 내려준다. 이를 알지 못한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잡고 하늘에 올라가다 줄이 끊어져 땅에 떨어져 죽게 된다. 반면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는 해와 달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똑같이 하늘로 이어진 듯 보이는 동아줄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누이에겐 하늘로 갈 수 있는 생명의 동아줄이었지만, 호랑이에겐 결코 하늘로 올라갈 수 없는 썩은 동아줄에 불과했다. 만약 우리 앞에 두 개의 동아줄이 내려와 있다면, 과연 우리는 오누이처럼 생명의 동아줄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까.

호랑이에게 쫓겨 언제 죽을지 모를 위기에 놓여 있던 오누이의 모습은 생명을 위협하는 수많은 위험요소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사망이라는 호랑이로부터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생명의 동아줄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 눈앞에 내려와 있는 동아줄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 신들의 수만큼이나 너무나 많다. 아무 동아줄이나 잡고 하늘로 갈 수 있다면야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안타깝게도 수많은 동아줄 중에서 우리가 잡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동아줄은 단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고린도전서 8:5)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예레미야 10:11)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이사야 37:16)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동아줄만이 우리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참된 생명의 동아줄이다. 그런데 지천에 매달린 수많은 동아줄들 중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생명의 동아줄을 찾자니 우리로서는 어느 것이 하나님의 동아줄인지 가려내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결단을 내리셨다. 생명의 동아줄이 어느 것인지 유일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의 동아줄이 무엇이며, 어떻게 잡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지 알려주기로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한복음 6:53~54)

우리가 잡아야 할 생명의 동아줄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새 언약 유월절을 통해 허락해주셨다(마태복음 26:17~28, 누가복음 22:7~20). 많은 신과 그 신들을 믿는 종교의 가르침 가운데, 우리가 하늘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견고하게 이어진 생명의 동아줄은 오직 새 언약 유월절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이 생명의 동아줄을 어떤 심정으로 대해야 할까? 언제 우리를 향해 덤벼들지 모를 사망이란 위험 앞에서 주저하며 망설일 여유를 부려도 괜찮을까? 낭떠러지 절벽에 매달려 생사의 기로에선 지푸라기라도 잡고 살고 싶은 심정이라는데, 이런 절박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아직 우리에겐 동아줄을 잡을 기회가 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보증해주신 확실한 생명의 동아줄 말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처럼, 영원 세세토록 빛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영광을 얻고자 한다면, 지금 당신의 눈앞에 내려와 있는 생명의 동아줄을 꼭 잡고 하늘까지 올라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출처_패스티브 https://www.pasteve.com/

2014년 9월 30일 화요일

하나님의교회 패스티브 [다수결의 폐해]

다수결의 폐해
성경대로 행하는 유일한 하나님의교회
 
 
 
다수결의 원칙은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가정 하에 다수의 의견을 전체의 의견으로 결정하는 집단 의사결정 방식이다. 의사결정에서 만장일치가 가장 이상적이지만 제각각 다른 생각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매번 하나로 모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고 구성원들의 입장이 갈릴 때 보통 ‘다수결의 원칙’을 들어 단체의 의사를 결정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의사결정 방식 중 하나인 다수결의 원칙에는 심각한 오류가 숨어 있다. 다수결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닌데도, 소수의 의견은 무시되고 다수의 의견이 정답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또 다수결로 결정된 사항이 잘못된 판단일 경우에도 그 결정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일례를 들어보자. 한 사진 동호회에서 출사를 가기로 했다. 동호회 회원들은 예쁜 사진을 담기 위해 사진기도 점검하고, 필름도 넉넉히 준비했다. 예쁜 옷을 입고, 맛있는 도시락도 싸서 기분 좋게 출발을 했는데 한참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출사장소가 초행길이었던 동호회 회원들은 당황했고,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각자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오른쪽 길일지 왼쪽 길일지 의견이 좁혀지지 않을 때 동호회 회장은 “다수결로 정합시다”라고 소리쳤다. 이에 동의한 회원들은 거수를 해서 총 20명 중 19명이 선택한 왼쪽 길로 출발했다. 하지만 가도 가도 목적지는 보이지 않고 고속도로에서 헤매다 시간을 다 보내게 되었다.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선택한 길이 목적지로 가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누구 탓도 못하고 서로 기분만 언짢아진 상태로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다수결의 원칙에 입각할 때 동호회의 의사결정 방식이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그리고 그 실패에 대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다수결의 최대 단점이다. 이렇듯 다수결의 원칙은 구성원간의 충분한 대화와 협의를 통해 소수의 의견도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과학적 지식이나 진실과 거짓 여부가 명확한 안건에 대해서는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할 수 없다. 지동설이 과학적으로 명백한 사실이지만,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사회 구성원의 과반수 이상이라고 하여 천동설이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당장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의 초행길을 걷고 있다(잠언 27:1). 이 세상에 어느 길이 성공의 길인지 알고 선택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가끔은 무의식적으로 대중의 선택을 따르는 경우도 많다.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만 자기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위안을 삼기도 한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도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에 옳고 그른 것은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데는 절대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될 수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진리를 찾기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가 옳은 교회이며, 큰 교회가 진짜 교회라는 오류에 빠져 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도 없는 일요일 예배를 지키고,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구원받았다고 자신한다. 과연 믿음의 다수결을 주장하는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했을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애굽기 20:8)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출애굽기 31:13)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누가복음 4:16)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느헤미야 13:17)


틀렸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안식일을 지키라 명하셨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악인이라 꾸짖으셨다. 하나님께 악인으로 정죄된 자가 구원을 받았을 리 만무하다. 이렇게 성경의 몇 구절만 살펴보더라도 안식일은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는 진실이다. 처음부터 다수결의 원칙이 거론될 일이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믿음의 최종 목적지는 천국이다. 하지만 천국은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미지의 세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행하느냐 행치 않느냐에 달려 있다(마태복음 7:21~23). 그리고 사람의 계명을 따르는 것은 인도하는 자도, 인도를 받는 자도 그 끝은 멸망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이사야 9:16, 마태복음 15:14). 친히 구원의 길이 되어 주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사는 길이며 옳은 길이다.
 
 
 
 
출처_패스티브 https://www.pasteve.com/
 
 

2014년 9월 28일 일요일

하나님의교회 패스티브 [갈릴레이의 망원경]

 갈릴레이의 망원경



인간의 시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너무 작은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먼 것도 볼 수 없다. 그러나 망원경을 통해서 살펴보면 아무리 작은 것도, 먼 거리에 있는 사물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90년 4월, 미국의 우주선 디스커버리호에 실려 지구 상공 610km 궤도에서 우주 관측을 하고 있는 허블우주망원경의 성능과 위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길이 약 13m, 무게 약 12t의 대형버스 크기의 허블우주망원경은 인간의 시력보다 100억 배 정도 뛰어나다. 16,000km의 먼 거리에서 빛을 내는 반딧불이를 관찰할 수 있고, 1.6km 떨어진 거리에서 머리카락 두께의 틈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지동설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처음부터 로마 카톨릭과 투쟁할 것을 각오한 것은 아니었다. 수학자였던 그는 물리학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실험을 많이 하였는데, 1609년 군사적인 용도로 개량된 망원경을 발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성능이 더 나은 망원경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망원경을 가지고 성능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달을 보게 되었다. 이제까지 그가 알고 있던 달은 유리구슬처럼 매끈매끈한 달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해보니 놀랍게도 움푹 파인 분화구와 울퉁불퉁한 표면을 갖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당시 사람들은 지구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었다. 천동설은 오랜 세월 동안 당연하게 여겨져 왔고 널리 보편화된 상식으로 굳어져 있었다. 이처럼 돌같이 딱딱하게 화석화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전 세계가 새로운 지동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결코 하루아침에 된 것도 아니고 쉽게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갈릴레오에 앞서 코페르니쿠스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지동설을 주장하긴 했지만 과학적인 증명이 없었기에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로마 카톨릭의 오판으로 갈릴레오 역시 이단학설을 주장하는 이단자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결국 그는 지동설을 입밖에 내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는 수모를 당하고, 종교재판 후 그는 8 년간의 여생 동안 가택연금을 당하는 고통 속에 임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갈릴레오 그가 망원경을 통한 천체 관측과 수많은 실험결과를 통해서 얻은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없었다면,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나 천주교의 천동설 신념과 일반인들의 상식을 뒤집는, ‘지동설’이라는 위험한 주장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확실한 증거자료가 있었기에 오랜 세월 불편했던 진실을 세상 밖에 드러내기 위한 거짓과의 싸움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온갖 협박과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지동설의 이론을 확립하기 위해 객관적인 증거자료를 확보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 고맙게도 그의 망원경이 일등공신 노릇을 톡톡히 해주었다.



무언가를 관찰하기 위해 망원경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그 조작법을 배우고 익히려고 애쓸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영적 세계는 육신의 안목으로는 볼 수 없는 곳이다. 아무리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한다 해도 결국 과학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영적 망원경에 해당하는 성경을 통해서만 놀라운 신비의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오직 성경만이 광활한 대우주의 영혼세계에 대한 지식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영혼문제를 탐구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최고의 값진 선물이자 영적 망원경인 ‘거룩한 말씀’이라는 뜻의 성경을 주야로 상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성경을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책 정도로 생각하고, 심지어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성능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용 목적도 모르고 사용 방법이나 필요성을 모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때 중세시대에는 일반인은 성경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고 금서목록에 올라 있다가 오랜 기간 후에 드디어 빛을 보게 되기도 했다. 이유는 1%의 탐욕을 꾸짖고 99%를 위로하는 책이라서 그랬다는 말도 있다. 당시엔 아마도 권력자들에게는 불편했던 책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성경을 깊이 연구하거나 성경대로 하는 것을 싫어하는 목사들이 많이 있는데, 뭔가 불편한 진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필자도 그런 목사를 만나본 적이 많다. 그들은 한결같이 성경을 펴지 못하게 방해하면서 자기 주장만 횡설수설 늘어놓는다. 그럴 때면 뭔가 진실이 드러나거나 거짓이 탄로날까 봐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오로지 구원을 목적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나 시련도 다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해봐야 할 것이며 무조건 ‘우리목사님’만 찾지 말고 성경에서 구원의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구원과 영생은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데 왜 ‘우리목사님’만 찾고 매달리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안식일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우리목사님’을 붙들고 뭘 배우겠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면, 잠잘 때마다 성경책을 머리맡에 두거나 교회에 오갈 때마다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어떤 각도로 보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넷째 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주일성수를 일요일에 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일요일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일곱째날 안식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이고 누구의 잘못인가? 이래도 되는 건가? 이게 어디 보통 문제인가?


성경말씀 외에 사람의 생각을 함부로 보태거나 빼면 재앙을 받거나 생명의 축복을 빼앗길 수 있다. 성경말씀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에 100%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의 권위적인 명령과 요구에 무조건 아멘으로 굴복하고 교단, 교파, 교리에 옭아매여 있지는 않은가? 설교의 방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엉뚱하게 성경에 없는 인간적인 철학과 교양강좌나 읊어대고 있는데도 소신껏 ‘성경말씀을 가르쳐달라’고 말할 수 없다면 심각한 상황이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생소하게 느끼고 있는 안식일, 유월절을 비롯한 하나님의 절기들, 재림 예수님, 어머니 하나님과 같은 말씀은 성경에 없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영적 망원경인 성경을 통해 얼마든지 확인하고 깨달을 수 있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라고 하셨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없는 주일성수,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을 신성시하고 합리화시키며 약물중독자처럼 각 교단의 교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도 성경에 기록된 안식일과 유월절 같은 진리는 한사코 외면하고 거부하는 이유는 각종 신학논리와 학설에 묶여 오랜 시간 정신적인 노예가 되어 있다 보니 생겨난 부작용일 것이다.


이것은 흡사 망원경의 관측결과는 무시하고 오직 자신들만의 편협한 상식과 기성교단의 세력을 등에 업고 끝까지 천동설을 주장하며 교단을 옹호하는 일에만 혈안이었던 카톨릭 종교재판소의 권위주의적 이단심문관들처럼 어리석은 과오와 잘못된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심히 안타깝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천동설 옹호자들의 등쌀에 못 이겨 기를 못 펴고 무시당하다가 결국 죽긴 했으나 이제는 전 세계가 그들의 지동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무리 거센 핍박과 비방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끝까지 따르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갈릴레오가 친구에게 편지로 남긴 말이 있다. "진실을 모르면 바보, 진실을 알면서도 거짓을 가르치면 범죄자"라고.




출처_패스티브 https://www.pasteve.com/?m=bbs&bid=B2BibleCovenant&uid=2680

2014년 9월 16일 화요일

하나님의교회 패스티브 [사과가 열린나무]

 사과가 열린 나무



성경 공부를 하다 보면 가끔 “안식일이나 유월절은 정말 확실한데 새 이름과 어머니 하나님은 믿기 힘들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그러면 그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안식일과 유월절이 영생의 길이라는 것은 정말 확실한가요?”
만약 안식일이나 유월절을 확실하게 인정한다면 다음 성경 말씀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13~20)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멸망으로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를 어떻게 구별하라고 하셨습니까?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울 때는 그 열매로 구별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이치를 들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때 그 열매를 보면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되는 열매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 하더라도 ‘불법’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거짓 선지자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이 바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판단하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에 대해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유월절이라는 법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법이 확실한가요? 그렇다면 일요일 예배나 크리스마스는 어떤가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법인가요, 아니면 불법인가요? 일요일 예배나 크리스마스가 사람이 만든 사람의 계명이요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불법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예수님께서 지키라 하신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확실하다면, 유월절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는 안상홍님과 어머니는 과연 어떤 나무일까요? 열매인 유월절은 생명과가 맞는데 그 나무가 생명나무라는 것이 믿기가 힘든 것인가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요 나쁜 열매가 맺힌 이유는 그 나무가 나쁜 나무이기 때문이다.”

열매는 사과가 틀림없습니다. 이 나무는 무슨 나무일까요? 사과가 맺혔으니 이 나무가 사과나무가 된 것일까요, 아니면 나무가 원래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사과가 열린 것일까요? 안상홍님과 어머니께서 참 선지자가 아니라면 결코 생명과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생명과는 반드시 생명나무에서만 열린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진리입니다.

안식일과 유월절은 분명한 생명의 진리인가요? 그렇다면 확실하게 믿으셔도 좋습니다. 안식일과 유월절을 알려주신 안상홍님과 어머니는 생명나무이신 성령과 신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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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0일 수요일

안식일 지키는 하나님의교회 [안상홍 증인회]

사라진 안식일

성경의 안식일은 토요일이다.
그런데 왜 많은 교회는 일요일에 예배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일주일의 첫째 날인 일요일을 휴일로 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요일이 휴일로 정해져 있는 나라의 국민들은 일요일에는 직장이나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는 1895년 양력(陽曆)과 칠요(七曜) 제도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관청 근무시간 규정에 일요일이 휴일로 정해졌고, 대한민국 헌정 후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공휴일로 제정된 이래 변함없이 일요일에 쉬고 있다.

일요일을 공휴일로 제정해 쉬기 시작한 건 1600년 전 로마였다. 321년 3월 7일, 당시 로마제국의 통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휴업령을 반포한다.

“모든 재판관과 시민 그리고 기술자들은 존엄한 태양의 날에 쉬어야 한다.”

한 주간의 첫날을 휴일로 반포하며 콘스탄티누스는 그날을 ‘태양의 날’, 즉 Sunday(일요일)라고 명명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정한 달력(율리우스력)을 보완하여 7일이 기본이 되는 칠요 제도를 도입했다.

7일 단위로 한 주간을 나누어 생활한 기원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신 창세기의 기록과 일곱째 날을 성일로 삼아 지켰던 기록이 그 기원이다(창세기 2:2~3, 출애굽기 20:8~11).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칠요 제도에 로마 점성가들의 사상에서 비롯된 일곱 별의 신(神)들의 이름을 접목시켜 요일명을 정했다. 일곱 별의 신들은 토성의 신, 목성의 신, 화성의 신, 태양의 신, 금성의 신, 수성의 신, 달의 신으로 불렸다. 이는 지동설이 등장하지 않았던 시대,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일곱 별의 신이 하루 24시간을 한 시간씩 차례대로 돌아가며 다스린다고 믿은 데서 기인한다.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운행하는 토성부터 목성, 화성, 태양, 금성, 수성, 달을 24시간에 맞춰 순서대로 배열하면, 첫 번째 열에 토성,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순으로 배열된다. 당시 점성가들은 바로 이 첫째 열에 오는 별의 신이 그날 하루의 첫 시간을 다스린다고 믿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바로 그 별의 이름을 그날의 요일명으로 정했던 것이다. 즉, 토성의 신이 첫 시간을 다스리는 날은 토요일, 태양이 첫 시간을 다스리는 날은 일요일, 달의 날은 월요일, 다음 화요일, 수요일, 수요일, 금요일이라는 요일이 만들어졌고, 그중 한 주간의 첫날을 태양의 날, 즉 일요일로 제정함으로써 일, 월, 화, 수, 목, 금, 토 순서의 칠요 제도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일요일 휴업령을 내리기 수 년 전이었던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관대한 정책의 칙령을 반포한 바 있다. 밀라노칙령이 그것이다. 그는 “이제부터 모든 로마인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 로마인이 믿는 종교는 무엇이든 존중을 받는다.”는 포용정책을 쓰며 이전의 황제들과는 달리 기독교를 핍박하지 않고 공인했다. 하지만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을 뿐 공식 종교로 삼은 건 아니었다.
 
역사가들은 그의 이런 행보에 대해 그가 이방종교의 최고위직 칭호를 여전히 지니고 있었고 죽을 때까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것을 미루어 볼 때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의도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당시 로마의 대다수 국민들이 미트라(태양신) 교도였기 때문에 그들을 달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로마 교회였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미트라 교도들을 전도하기 위해 그들의 제도를 많이 끌어들였다. 그중에 하나가 그들이 태양신에게 예배하던 ‘일요일’을 예배일로 정한 것이다. 황제가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일요일에 예배하는 것은 퍽이나 합리적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계명일 뿐이었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산중으로, 사막으로 피해 믿음을 지켜나갔다.
 
일요일 휴업령이 반포된 지 4년 후인 325년, 가톨릭은 니케아공의회를 통해 예배일을 안식일(토요일)에서 일요일로 공식적으로 바꿨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일로 정하신 일곱째 날 안식일은 이렇게 사라졌고,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감춰져 있었다. 하나님의 구속의 때가 되어 진리의 빛이 드러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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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7일 목요일

하나님의교회 엘로힘 [어머니하나님]


[ 어머니 하나님 ]
 
하나님은 두 분이다.
성경은 심해와 같다. 깊고 오묘한 수수께끼의 연속이다.
수수께끼는 성경 첫 장부터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우리’라는 하나님이다. 아니, ‘하나님들’이다.
 
 
 
구약성경의 원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나님’이 복수명사 ‘אֱלֹהִים (엘로힘)’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들’로 해석되는 이 표현은 구약성경 39권에 걸쳐 2500회 이상 등장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엘로힘’이라는 이 수수께끼 같은 단어 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하나님들,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통해 당신을 왜 복수의 하나님으로 표현했는지 알려주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모델로 하여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이는 남성적 형상의 하나님과 여성적 형상의 하나님 두 분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두 분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사역을 하시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도 한 분이 아닌 두 분,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항상 두 분의 하나님이 역사하셨음을 ‘엘로힘’과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1:1~7)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8)


오만한 인간들의 바벨탑 건설을 중단시키시는 역사를 행하시는 분도 두 분이다. 복음을 전할 사람들을 찾으시는 분도 한 분이 아니다. 이는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이 늘 두 분이 존재했다는 증거다.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다.

하늘 가족의 대표, 아버지 하나님
대개는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요한복음 8:41)”,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에베소서 4:5~6)” 하신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아버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뜻이지, 하나님이 유일신이기 때문에 한 분만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아버지 하나님은 유일하게 한 분이라는 말씀이다. 다른 어떤 신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한 분뿐”이라고 하신 것은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반증이다.


하나님은 분명 두 분이신데, 성경은 왜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표현한 것일까.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대표성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을지라도 가족의 대표인 아버지의 이름만 적어 문패를 거는 이치와 같다. 누구나 아버지의 이름이 갖는 대표성 때문에 그 집에 아버지 혼자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어머니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늘 가족에도 이처럼 대표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어머니 하나님이 계신다.

또 다른 예로,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성경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로마서 5:12~19). 즉,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두 사람인데도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담이 갖는 대표성 때문이다. 이를 두고 하와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하신 말씀을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단편적으로만 이해하여 곡해한 것이다.

엘로힘, 성령과 신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는 장면은 성경 전반에 걸쳐 담겨 있다. 다음은 성경 마지막 장에 묘사된 두 분의 구원자에 대한 기록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하나님께서 성령과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예언이다.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이다. 신부(bride)는 말 그대로 성령의 아내이니 ‘어머니 하나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과 신부는 창조 시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시며 인류를 창조하신 엘로힘,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다.


어머니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 마지막 성령시대에 이 땅에 오셨다.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일은 아버지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출처_패스티브